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딸을 잃은 엄마가 8년 만에 살인범을 직접 납치해 경주로 향합니다. 영화 <경주기행>은 2026년 8월 26일 개봉한 범죄 블랙코미디로, 이 한 줄 설정만으로도 극장 좌석에서 몸이 앞으로 당겨지더라고요. 보고 나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못 일어났습니다. 이 영화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이유, 직접 보고 느낀 대로 짚어보겠습니다.

 

ⓒ 롯데엔터테인먼트

무거운 소재를 슴슴하게 — 블랙코미디가 만든 숨구멍

영화는 블랙코미디(Black Comedy)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. 블랙코미디란 죽음·범죄·폭력처럼 무겁고 어두운 소재를 유머로 비틀어 풀어내는 서사 기법으로, 관객이 웃다가 뒤통수를 맞는 구조가 특징입니다. <경주기행>은 살인범 납치라는 극단적 설정을 단란한 가족여행 외피 안에 숨겨놓고, 그 간극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게 만듭니다. 저도 초반 30분은 "이게 웃어도 되는 장면인가" 싶으면서도 계속 웃었습니다.

오프닝에서 막내 동주가 차 안에 들어온 벌레 한 마리를 잡으려다 차 유리를 박살 내는 장면이 있습니다. 처음엔 그냥 황당한 개그처럼 보이는데, 나중에 보면 이 깨진 유리가 살인범 백상현이 차 안으로 침입하는 통로가 됩니다. 복선(伏線) — 즉 이후 전개를 미리 암시하는 장치 — 을 이렇게 유머 안에 녹여두는 방식이 꽤 영리하더라고요. 벌레 한 마리 잡으려다 가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셈인데, 이게 옥실의 복수 계획 전체와 겹쳐 보이는 순간 영화가 하려는 말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.

배우들의 앙상블(Ensemble) — 여러 배우가 균형 있게 화학반응을 이루는 연기 방식 — 도 이 영화를 버티게 하는 중심축입니다. 이정은은 딸을 잃은 분노와 사랑,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고요하게 눌러 담는데, 그 무게감이 스크린 밖까지 전달되더라고요. 공효진·박소담·이연의 세 자매는 저마다 엄마와의 온도 차가 달라서, 가족이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짊어지고 있다는 걸 대사 없이도 읽힙니다. 변요한의 눈빛은 솔직히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. 누구 하나 튀거나 뭉개지지 않고 매끄럽게 맞물리는 연기라서, 보는 내내 숨을 참고 있었어요.

  • 블랙코미디 기법으로 복수극의 무게를 분산, 관객의 감정 소진을 방지
  • 복선과 유머를 같은 장면 안에 배치해 서사 밀도를 높임
  • 앙상블 연기로 각 인물의 개별 서사를 균형 있게 전달
  • 자극적 폭력 연출 최소화로 메시지 전달력 오히려 강화
요약: 블랙코미디와 촘촘한 앙상블 연기가 어우러져, 무거운 복수극을 거부감 없이 끌어당기는 힘이 됩니다.

 

사적제재가 왜 공감받는가 — 피해자 유가족의 자리에서 본 법의 빈틈

영화가 진짜 무서운 지점은 백상현의 납치가 아닙니다. "그럴 수밖에 없겠다"는 생각이 드는 순간, 저 자신이 무서웠습니다. <경주기행>은 사적제재(私的制裁) — 국가 사법기관을 거치지 않고 피해자나 그 주변인이 직접 가해자를 응징하는 행위 — 를 미화하지 않으면서도, 왜 그 선택에 손이 가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.

법원에서 백상현의 교화 가능성을 이유로 비교적 짧은 형량을 내리는 장면, 그리고 출소 후 그가 또다시 사람을 해치는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날카로운 비판입니다. 재범률(再犯率) — 형사처벌을 받은 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비율 — 의 문제가 실제 법정에서도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을 짚는 것이죠. 실제로 한국형사·법무정책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강력범죄 전과자의 재범 위험도는 초범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습니다(출처: 한국형사·법무정책연구원). 영화는 이 지점을 직접 꺼내며, 피해자 가족의 분노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명확히 합니다.

옥실이 산 정상에서 백상현에게 "용서하고 싶어질까 봐 두려웠다"라고 말하는 장면이 저는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습니다. 피해자 유가족에게 용서와 자비를 요구하는 사회의 시선, 즉 피해자학(Victimology) — 범죄 피해자와 그 주변인이 겪는 심리·사회적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 — 에서도 지속적으로 문제로 지적되는 2차 피해 구조가 이 한 문장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.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보면서 느낀 건, 옥실이 용서를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용서를 허락받지 못한 채 8년을 버텼다는 거였습니다. 딸의 피해자가 용서를 선택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데, 살아있는 가족이 대신 용서할 수 있냐는 질문은 보는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.

영화 제목 <경주기행>은 김승옥의 소설 <무진기행>(출처: 국립중앙도서관)을 의식한 작명으로 읽힙니다. 무진기행의 주인공이 '무진'으로 향해 이전 삶과의 단절을 시도했듯, 옥실 가족은 막내의 이름과 같은 땅 '경주'에서 8년간의 고통을 닫으려 합니다. 딸의 이름이 쓰인 도시에서 복수를 마무리하고, 그 이름을 다시 아름다운 기억으로 돌려놓으려는 의도가 제목 한 단어에 응축돼 있습니다. 저는 이 작명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가 감정에만 기대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.

다만 솔직히 아쉬운 것도 있었습니다. 앞부분이 그렇게 탄탄하게 쌓이더니, 후반으로 갈수록 개연성이 조금씩 헐거워지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. 딸들과 엄마가 감정을 주고받는 흐름으로 마무리됐으면 더 단단했을 것 같은데, 결말이 살짝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쌓아온 몰입이 조금 흔들렸습니다. 배우들의 연기가 워낙 좋았던 것에 비해 극본의 깊이가 끝에서 아쉬움을 남긴 건 사실입니다.

요약: 사적제재라는 민감한 소재를 법의 빈틈과 피해자 유가족의 실제 감정 구조로 풀어내며, 복수보다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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자주 묻는 질문

Q. 경주기행 폭력 수위가 심한가요? 자극적인 장면이 많은지 궁금합니다.

A.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에 걸맞게 직접적인 폭력 묘사는 최소화되어 있습니다. 납치라는 설정 자체가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, 실제 연출은 생각보다 슴슴한 편입니다. 고어(gore) 장면을 걱정하고 계신다면 크게 부담 없이 보실 수 있는 수준입니다.

 

Q. 블랙코미디라고 하는데 웃기기만 한 영화인가요?

A. 웃기기만 한 영화와는 거리가 멉니다. 중간중간 피식 웃게 만드는 지점이 있어서 감정에 숨구멍을 만들어주는 구조인데, 그 덕분에 오히려 진지한 장면이 더 깊게 파고듭니다.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게 되는 영화입니다.

 

Q. 사적제재를 미화하는 내용인가요? 불편하지 않을지 걱정됩니다.

A. 영화는 사적제재를 단순히 통쾌하게 포장하지 않습니다. 그 선택이 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유가족의 시선에서 담담하게 보여주면서, 법과 피해자 사이의 간극을 짚습니다. 보고 나서 시원하다기보다는 씁쓸하고 복잡한 감정이 남는 편입니다.

 

Q. 이정은, 공효진, 박소담 중 누구의 연기가 가장 인상적인가요?

A. 제 경우엔 이정은이 압도적이었습니다. 엄마 옥실의 분노와 슬픔,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크게 터뜨리지 않고 눌러 담는 방식이 오히려 더 오래 남더라고요. 공효진·박소담·이연의 자매 서사도 각자의 색이 뚜렷해서 누구 하나 묻히지 않습니다.

 

결론

영화 <경주기행>은 복수극이지만 결국 유가족이 어떻게 살아남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.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와 자비를 먼저 요구하는 세상에 조심스럽게 반기를 들면서, 진정한 위로는 제대로 된 법의 집행에서 온다는 말을 담담하게 건넵니다. 후반부 개연성이 조금 흔들리는 아쉬움이 있었지만, 올해 본 한국 영화 중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임은 분명합니다.

저처럼 딸을 둔 엄마 이야기에 공감하시는 분, 혹은 한국 사법 시스템의 빈틈에 답답함을 느껴본 분이라면 극장에서 보시길 권합니다. 보고 나서 바로 일어나기보다는 잠깐 앉아서 여운을 소화하고 나오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.

참고: https://blog.naver.com/seok9c/224391609497